저격술, 제2차 세계대전의 유물로 간주

 

 태평양 전쟁시 미 해병대는 미 육군보다 저격전 개념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전선에 근접해 저격수들을 배치했다.

 미 해병대의 오덴(G. Orden)은 전장에서 점점 증가하는 저격수의 역할과 그 능력을 지지하는 선도자였고, 1942년 로이드(C. LIoyd)와 함께 해병대의 저격술 발전을 강력히 주장했다. 오덴의 주장은 해병대 저격수가 단지 군용 소총의 개량품보다 전문적인 저격용 소총, 또는 사냥용 소총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당시 대부분의 법무장교들은 살인주의적인 위험한 생각이라고 치부 했다.

 오덴은 윈체스터 G7044C 소총이 미국에서 이용 가능한 좋은 무기라는 것을 알았다. 이 총은 정확하고 무거운 총열을 가진 노리쇠 작동식 사냥총이었으며, 8배율 스코프와 이에 맞는 탄약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해병대는 이미 특공대의 유명한 에디슨(M. Edson)의 요구로 이 총에 대한 전투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군수 보급체계에 또 다른 소총의 도입이 어려웠고, 스프링필드와 M1모델에 대한 선호 때문에 결국 윈체스터 총이 거부됐다.

 해병대 저격수들은 M1903A1모델의 스프링필드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이 총은 8배율 망원조준 스코프가 장착됐다. 이 조준경은 손상되기 쉬웠지만 장거리 사격에서 높은 확대력을 제공해 주었다.

 전시에 대부분 연합군들이 저격수 훈련을 소홀히 할 때에도 해병대의 저격수 훈련은 크게 달랐다. 1942년 12월, 노스캐롤라이나의 레준(Lejeune) 캠프와 캘리포니아의 그린 팜(Green’s Farm)에 세워진 저격수 훈련소에서는 보다 정예화한 훈련이 실시됐다.

 미 해병대의 그린 팜 훈련소는 유명한 저격수이며 1935년 전국 소총 챔피언십의 우승자인 해리스(C. Harris) 대위가 지휘했다. 그는 5주 동안의 교육과정을 통해 15개의 막강한 저격팀을 양성했다.

 다양한 교육 과정에는 사격·위장·정찰·전술·독도법·사경도 작성, 그리고 항공사진 해석 등이 포함됐다. 이는 저격수가 정찰대 역할도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해병 정찰 저격수’라는 그들의 공식 명칭에 걸맞은 여러 가지 훈련을 이수하는 것이었다.

 1943년 11월, 타라와 섬 전투에서 해병 정찰저격 소대가 기습부대로 운용됐는데, 이들은 주공으로 공병과 함께 상륙해 일본군 해안 방어선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전투에서 해병 저격수는 일본군의 강점을 집중 공격했고 특히 포병사격을 저지하거나 곤란하게 만들었다.

 1945년 8~10월 간 오키나와 전투시 미 제2해병 사단의 저격수는 나무가 우거진 산악 고지에서 싸우면서 일본군 방어요새를 제거하도록 지시받았다. 이 전투에서 해병대 저격수 카스(D. Cass ) 일병은 적어도 1200m 거리에서 적의 기관총 진지를 붕괴시켜 해병대의 전진을 도왔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이토록 저격수의 능력과 그 성과가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 해병대는 전반적인 저격술의 효과에 대해 여전히 이해력이 부족했다. 관심의 초점은 합동 상륙작전이나 공중 공격과 같은 대규모 전투의 성공, 혹은 태평양전쟁의 주도권 장악에 있었다.

 새로운 전쟁 스타일 즉, 공중폭격과 함포사격 그리고 대포가 동원되는 치열한 전쟁에서 적어도 소총사격에 지나지 않는 저격술에 대한 관심이나 주장이 야망적인 장교들의 출세에는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년 4월, 미군은 전후 해병대의 저격술 훈련계획을 완전히 취소해 버렸고, 심지어 명품인 스프링필드 소총을 처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격술에 대한 해병대의 불신은 태평양을 배경으로 미 육군에게도 즉시 파급됐다. 미 제8군 사령부에서도 현대전에서 저격수는 불필요하지만, 필요시 말단 중대급의 저격병을 운용한다고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의식과 인명 살상, 살인행위에 대한 인도적 거부감이 팽배했다. 이러한 경향은 미군 전체에 걸쳐 퍼졌고 저격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유물로만 간주됐다.

 서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저격술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패전국인 독일도 저격술 발전에 한계가 있었고, 독일 국방군이 1950년대에 이르러 다시 정예부대로 육성됐을 때, 그들의 관심은 서독 방어의 일환으로 바르샤바국의 전차에 대응한 기갑전술에만 치중하고 저격술은 당연히 소외됐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소련은 모든 붉은 군대 중대급 단위에서 저격수를 기본적으로 유지했다. 이는 공산혁명의 도구로서 주변국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영국군은 전후 즉시 저격술을 중단했지만 식민지 전쟁에서 저격수가 필요할 때 다시 가동시켰다. 오직 독단적으로 영국 해병 특공대만이 저격술을 계속 발전시켰으며 후일, 이들이 다른 유럽 군대를 위한 공식적인 저격술의 계승자가 됐다.

 

국방일보(http://kookbang.dema.mil.kr/) 2008.08.05
<양대규 전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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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밀리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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