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계십니까?

 59년 전에 발발했던 6.25 전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됨과 동시에 수많은 나라들을 혈맹으로 얻은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6.25 전쟁 당시 UN 군의 주축이 되었던 미국을 기억하면서 UN 군으로 참전해 이 땅에 피를 뿌리며 산화해 간 21 개 UN 군 참전국의 전우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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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대한민국 공군인으로서 조국의 창공을 함께 비행하며 평화를 지켜낸 공군 참전국이 어느 나라들인지 알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아쉬운 것은 6.25 전쟁에 대한 수많은 역사적 기록과 연구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사실(事實)에 대한 서로 상이하거나 편중된 기록들로 인해 6.25 전쟁에 대한 역사, 특히 공군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한 번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기록물을 찾기란 쉽지 않은 형편이라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최근에 정리된 6 .25 전쟁 중 ‘항공전사’에 대한 기록은 공군본부에서 발행한 『공군사 제 1 집 증보판』 (공군본부, 1991 년 발행)에 수록되어 있으며,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항공전사』 (공군본부, 1989 년 발행) 를 참고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미 극동공군의 활동을 제외하고 6.25 전쟁에 공군전력을 참전시켰던 여타 나라들의 기록에 대한 접근성은 여전히 낮기만 하다. 심지어 6.25 전쟁에 공군을 보낸 나라가 몇 개국이냐를 두고도 아직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왜 호주인가?

 

 사진에서 보는 낡은 기사는 1953 년 1월 17 일 창간한 ‘공군위클리’ 1 면에 실린 기사이다. 이 기사는 1 면의 전체 기사들 중에서 가장 큰 크기로 지면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한국공군 증강’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호주 공군장관이었던 윌리엄 맥마흔(William McMahon 1908.2.23~1988.3.31) 의 귀국성명서 내용을 다룬 것이다. 물론 전쟁 중인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당시 UN 참전국 중 한 나라 장관의 소식이기는 하지만 창간호에서 가장 큰 비중으로 다룬 것이 매우 의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서냉전체제로 전이되는 과정의 한복판에 선 시점에서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국제정치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적은것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잘 살펴보면 위 기사의 우측 하단에 있는, 당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혈맹 미국의 해군장관의 기사보다 더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그 이유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언명하기를 한국공군에 수대의 전투기를 제공하였으며, 앞으로도 더 원조할 것을 호주정부에 요청하였다”라는 문장이다 . 당시 호주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 전쟁 참전을 결정했으며, 공군 1 개 전투비행대대를 비롯해 17,000 여 명이 참전한 최대 우방국 중 하나였다. 더구나 개전 초기 미국으로부터 긴급 인도받은 F-51 10 대 중 두 대를 1950 년 7 월과 10 월에 각각 잃고 8 대를 보유하고 있어 전력증강이 절실했던 한국공군에 호주는 1952 년 11 월 26 일에 두 대의 F-51 을 한국공군에 기증했다. 2) 
      

 

 호주공군 (The Royal Austrailian Air Force, RAAF) 은 공식적으로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일주일 만인 1951 년 7월 2일에 참전했다. 3)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호주 공군의 제 76, 77, 그리고 82전투비행대대는 영연방 점령군 (British Commonwealth Occupation Force)의 일원으로 일본 이와쿠니(岩國)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후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단독으로 영연방군 대표로 일본에 주둔하던 호주군은 1950년에 이르러서는 제 76 전투비행대대와 82전투비행대대가 철수하고 제 77 전투비행대대 만이 美 제 5공군 작전 지휘하에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본토로 향하는 미군의 폭격기를 엄호하는 임무를 위해 F-51 무스탕 전투기4) 를 한반도 상공으로 출격시키면서 미국을 제외하고 UN 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  
      

 

 전쟁 초기 폭격기엄호 임무와 적 지상군을 향한 저고도공격 임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이후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임무로 교량 , 철도 등의 파괴 임무에 투입되었다. 무엇보다도 전쟁 중 긴급 복구되어 운영 중인 황량한 활주로 여건들은 더 길고 완벽하게 포장된 활주로가 필요했던 제트기들에 비해 오히려 무스탕 전투기들에 유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5)

 

 1951 년 제트기로 전환하기 전까지 호주공군의 무스탕은 이와쿠니 , 대구 , 김포 , 연포 기지를 거치면서 하루 여섯 소티씩 비행하며 작전을 수행했다 . 호주공군 조종사들과 무스탕 전투기는 당시 탁월한 공대지임무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북한군의 지대공 공격의 표적이 되어 작전수행 일 주일 만에 첫 번째 희생자를 냈다. 6)

 

 이후 UN 군이 북한군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항공전력들이 한반도 내로 전개하면서 대구로 이동했고, 1950년 10월 호주공군은 UN 사령부의 전력 재편계획에 따라 제91혼성비행단 소속이 되었다. 77대대가 속한 91혼성비행단에는 491정비대대, 391기지대대 그리고 제30수송부대가 포함되었다. 특히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이 491정비대대에 이동 편성되면서 무스탕에 대한 야전정비지원이 가능하게 되면서 항공기 운용률도 상승했다.

 

 1951년 4월, 77대대는 일본으로 일시 철수해서 기존의 무스탕 전투기를 영국제 글로스터 미티어 (Gloster Meteor T7 A77-702) 전투기로 기종 전환했다. 당시 77 대대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영국에서 제작된 글로스터 미티어 전투기는 영국에서 일본의 이와쿠니 기지로 직접 이송되었다. 이전에 美 공군과의 교환근무를 했던 한두 명의 조종사만이 제트기를 이용한 임무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기종전환에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7). 결국 두 달 간의 기종전환 훈련을 마치고 1951년 7 월 77대대는 전투임무에 복귀했다.  
      

 

 

 한반도로 재전개한 제 77 비행대대는 美공군과 여타 UN 군 대대들과 함께 김포기지에 자리를 잡고 휴전 때까지 그곳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제트기로 기종전환을 마치고 돌아와 공중전에서의 전과를 기대하고 있던 제 77비행대대는 중공과 소련의 미그기에 대항해 ‘도그 파이트 (Dog Fights)’를 수행할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이 지속적으로 중공군에게 제공한 MiG-15 의 성능은 F-86을 제외한 대부분의 UN 군 전투기보다 뛰어난 가속력, 상승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종전환 이후 1951년 8월 25일 F-84E 전투기와 MiG기 간의 전투에서 MiG 기와 최초로 조우한 77 전투대대의 글로스터 미티어 전투기는 공중전투에서 MiG 기에 대적할 만큼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했다. 8) 결국 제77전투대대의 임무는 북한 상공의 제공임무에서 방어제공 임무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호주 공군은 11월에 다시 공대지 임무를 맡아 수행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UN 군 보유 항공전력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공대지 공격능력을 보유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9)

 

 6.25 전쟁에 참전한 동안 제 77 비행대대 조종사들은 총 1만 9천 소티를 비행하였으나 공대지 임무에 집중한 결과 휴전 때까지 제77비행대대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34 명의 조종사가 임무 중 사망하고, 여섯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는 전체 참전 조종사 수의 1/4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게다가 영국공군 교환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사망한 네 명의 조종사와 포로로 잡힌 한 명의 조종사를 포함하면 그 수는 늘어난다. 10) 휴전 후 제77비행대대는 1954년 10월까지 UN 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하다가 일본으로 이동해 그해 11월, 항공모함 Vengeance호에 실려 귀국했고, 정비를 담당했던 491정비대대는 12월에 해산하였다.

 

 한편 Douglas Dakota 수송기를 운용하던 제30수송부대 11)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영연방 주둔군을 지원했다 . 동(同) 부대는 1953년 3월부터 제36공수비행대대로 변경되어 한국과 일본 사이를 정기적으로 비행하면서 병력과 물자를 한국으로 수송하고, 여성 간호사가 동승한 가운데 부상자들을 일본 내의 병원으로 후송하는 임무와 UN 군 사령부를 위한 VIP 수송임무를 수행했다.12) 특히 36 공수비행대대수송대대 소속 다코타 수송기 두 대는 1956 년 6 월까지 일본에 주둔하여 공수임무를 수행하였다. 임무를 종료할 때까지 이 두 대의 항공기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정기노선을 운항하면서 인원과 우편을 수송했다 . 
 

 

 한국의 6.25 전쟁에 공군전력을 참전시켰던 나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만났던 각국 대사관의 대사와 무관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과거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과거에 대한 전후 세대들의 무관심과 무지를 걱정했다. 그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나라들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국의 어린 학생들이 제1차, 2차 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은 알아도 ‘한국전쟁’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개탄했다.

 

 그러기 때문에 기성세대들, 꼭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아닐지라도 자유세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서 검붉은 선혈을 이 땅에 뿌리며 숭고한 목숨을 바친 젊은 영혼들의 소중한 희생을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이 다음 세대에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바로 ‘소중한 관계’이다. 누가 내 조상에게 못된 짓을 얼마 만큼 했는지 새기고, 언젠가는 꼭 되갚아주리라고 앙심을 품기보다는 생면부지의 흰옷 입기 즐겨하고 검은 눈동자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더 이뤄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위 사진의 인물은 호주 멜버른의 치주전문의사인 Dr. Ross Bastiaan 씨 이다. 그는 자비와 개인들의 기부금 70만 불을 들여 세계 20 개국에 160 개의 호주군 역사 기념동판을 직접 제작해 설치해 왔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그는 기념동판을 제작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역사에서 호주의 역할을 알리는 데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미 1998 년에 6.25 전쟁 당시 호주군의 역할을 기리는 동판을 제작해 한국에 기증한바 있다. 
 
참고문헌

『航空戰史 - 韓國戰爭』 ( 공군본부 , 1989)

『 UN 공군사 上 ( 한국전쟁 1950. 6~1952.6) 』 ( 공군본부 譯 , 1975)

『공군사 제 1 집 증보판 (1949~1953) 』 ( 공군본부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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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0km 밖에서 敵기지 초토화 ‘타우러스’ 미사일

 
기사제공= 주간 공군웹진 공감 / 공군본부 문화홍보과 소령 라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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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e밀리터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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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sdf

    그래봤자 더러운 양놈들일 뿐.... 저들이 선의를 가지고 한국을 도와줬다는 착각은 버리자

    2009.06.17 13:59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1234

    댓글이 가관이구나... 당연히 국제사회에서의 자국에 목소리를 높힌다던지.. 파병으로 인해 향후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는 등의 부가적인 이유가 이면에 있을 수는 있겠으나..자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버려가며 우리나라를 도와줬다는 팩트는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한국전에 참전하여 불구가 되고 자신의 동료를 모두 잃었지만 한국의 발전된 모습을 보며 한국전 참전을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호주인 할아버지를 보고도 당신은 그 잘난 입을 놀릴 수 있겠는가?

    2009.06.17 14:40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그래서 혈맹이라잖아요.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 한번 더 감사함 되새겨 봅니다.

    2009.06.17 14:5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4. ASDF이런수박씨발라먹을분진을봤나

    사람이면 먼저 고마움부터 가져라. 그 이면의 정치상황은 머리 한구석에 놓아두었다가 필요할때 꺼내는거야. 뜨거움은 마음으로 느끼는거고. 도대체 뭘먹고 자라면 너 같이 되냐?

    2009.06.17 15:5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5. 화니

    명선이를 죽인 호주기 편대.. 나빠요..ㅋㅋ

    2009.06.17 19:11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6. zzzz

    아나 명선이 이해한건 나뿐인가 ㅅㅂ ;;;

    2009.06.23 17:15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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